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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5414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 어빈 얄롬 -

 

너무나 많은 소망. 너무나 많은 갈망들. 그리고 몇 분이면 떠오를 만큼 너무나 표면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 숙명적 고통. 실존적 고통. 언제나 거기에 있고 삶의 표피 바로 밑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고통. 고통은 너무나 쉽게 맞닥뜨려 진다. 단순한 집단 작업, 단 몇 분간의 되돌아봄 등 여러 가지를 통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우리의 깊은 소망들이 생각나게 되는 것이다. 젊음에 대한 소망, 늙지 않기를, 사라져버린 사람이 돌아오기를 영원한 사랑과 보호 그리고 의미가 되기를 영원 불멸에 대한 소망 등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들이 떠오른다.

우리가 가족에게, 친구에게, 종교에 그리고 때로는 심리치료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때는 바로 결코 이룰 수 없는 소망이 자신의 삶을 압도하여 지배할 때이다.

 

심리치료의 근본적인 자료는 흔히 주장하듯 억압된 본능적 욕구라든가 불완전하게 묻어버린 비극적인 개인의 과거 편린들이 아니라 항상 이러한 실존적 고통이다. 근본적 불안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실존 속에 이미 주어진, 삶 속의 모진 사실에 직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떠오른다는 것이다.

실존에는 이미 존재하는 네 가지 사실들이 심리치료와 관계가 있다.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죽는다는 사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대로 우리 삶을 만들어야 할 자요, 궁극적으로는 혼자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분명한 삶의 의미나 의식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죽음이 다가올 것이며 거기에는 피할 길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어려서 생각도 하기 이전부터 배운다. 스피노자의 말을 빌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려고 노력을 한다. 인간의 핵심에는 존재를 지속시키고 싶은 소망과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인식 사이에 갈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현실에 순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부정하고 도피할 방법을 고안하는 재주를 부린다. 어렸을 때는 부모들이 안심을 시키고 세속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신화의 도움으로 죽음을 부정한다. 그리고 후에는 죽음을 실체, 괴물, 잠귀신, 악마 같은 것으로 변형시켜 인간화한다. 죽음이란 것이 뭔가 추구하는 실체가 된다면 이를 교묘히 빠져나갈 방법을 결국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죽음을 안고 있는 괴물을 두려워 하는 것이 진실, 즉 자신이 죽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는 것보다 덜 두려울런지도 모른다. 후에 아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죽음에의 불안을 희석시키는 실험을 한다. 죽음을 조롱하여 그 독을 제거하려 하거나 그에 무모하게 도전하거나 또래들과 버터 냄새 가득한 팝콘을 먹으며 안심하고 유령 이야기나 공포 영화를 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무감각해진다.

성장해감에 따라 우리는 죽음이 의식되지 않도록 죽음을 의식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배운다. 여러 가지에 정신이 분산되면서 뭔가 긍정적인 것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 집이라는 안식처로 돌아가는 것, 신과의 조우, 궁극적 평화- 으로 변형을 시키게 된다.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신화를 가지고 죽음을 부정하고 자식을 통해 나의 씨앗이 미래로 이어진다고 믿거나 혹은 영혼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종교를 가짐으로써 결코 자기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으며 인간의 유한성과 싸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부정을 주제로 논쟁을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리는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죽는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방황할 일이 뭐가 있는가?’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알고 다시 말해 지적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를 압도할 불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죽음과 관련된 공포를 완전히 분리. 혹은 해리시켜 의식되지 않는 부분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리 과정은 무의식적이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드문 경우나마 그 부정의 기제에 실패하여 죽음에 대한 불안이 온전한 힘을 가지고 밀려올 때 우리는 실존의 그 사실들을 확신할 수 있다. 보다 공통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악몽을 통해서 표면에 떠오른다.

 

사랑에의 강박관념이 뿌리 뽑혀야 했다. 왜냐하면 사랑에의 강박관념이 좋든 나쁘든 새로운 경험을 못하도록 막기 때문에 삶을 메마르게 한다.

나는 내 마음, 내 생각, 내 꿈속까지 엄습해 들어오는 한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의 이미지는 내 마음에서 일상이 되어 이를 몰아내려는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은 다 괜찮아서 나는 그 강박관념을 좋아했고 자꾸 신선하게 그 맛을 느껴보곤 했다. 몇 주 후 나는 아름다운 섬으로 가족들과 일주일간의 휴가를 갔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그 여행의 모든 것, 해변의 아름다움, 무성한 이국적인 식물들, 파도타기 스릴 등을 놓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풍요로운 현실이 나의 강박적인 생각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거기에 없었다. 재방송을 보고 또 보듯이 그리고 거기서부터 초점도 없는 환상을 되풀이하며 나는 내 생각에 갇혀 있었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흠씬 채우기 위해서도 나는 나의 분석에 돌입했고 몇 달간의 힘든 시간 후에 나의 마음은 나의 것이 되어 삶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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